삼월 이십육일
손 끝이 제법 차갑고, 망막과 각막에서 온도가 느껴진다. 목 아래 쪽 멍울은 작진 않지만 신경은 쓰이는 정도.
원석이는 6년을 조금 넘게 알게 된 친구다. 다른 지인들과는 조금 다르게 정말 '음악'을 함께 하기 위해 소개받았다.
당시 나는 체온이라는 팀을 구상하고 기타인 웅비와 데모 트랙들을 낡은 맥북에 녹음하던 때, 우리는 꽤 까다로운 조건의 연주자들을 필요로 한 탓에 기준치를 낮춰야할지 고민하며 곡을 지어가던 중이었다.
드러머의 조건은 이하와 같았다. 작곡과 악기 연주, 소리에 대한 관념과 이해가 있으며, SPD와 같은 전자 장비 활용 능력과 함께 클릭을 위해 플레이백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나이대가 비슷한 사람이었다. 녹음과 공연 경험이 많은 사람. 음악의 방향성을 가리지 않으며, 험악한 언행을 하지 않는 사람. 더불어 공감각적인 이해도를 풀어낼 수 있어야 하며, 연주할 줄 알되 화려함만이 답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 지금 적어도 참 어이가 없는 조건이긴 하다.
그러던 중 웅비가 자기 학교에 자작곡을 위해 7/4 박자(!)에 활질을 하는(!) 기타를 구한다는 드럼 연주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학교 앞 파란 지붕에서 전골에 소주를 마시러 만났다. 갑작스럽게 만났지만 대화의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합주 일정을 잡았고, 이후 베이스를 연주하는 종현이형을 다른 학교에서 소개받아 합주를 진행했다.
종현이형 이야기는 다음에 더 중점적으로 적을 예정이지만, 시규어로스와 도나웨일 이야기를 하며 친해졌다. 덕분에 미틈이라는 팀과 동욱이형, 무이 누나 등 다양한 지인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너무도 고마웠다. 사람을 소개해줄 때 참 차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 줄 아는 사람. 일단 여기까지 적고 오늘은 원석이의 관한 이야기이기에 글을 줄일 생각이다.
베이스의 조건은 이하와 같았다. 이 또한 적을 생각을 하니 새삼 어이가 없는데, 4현이 아닌 5현이나 6현 베이스를 연주할 줄 알아야 하며 역시 작곡과 화성학의 이해도가 높은 사람, 녹음과 공연 경험이 많은 사람. 이펙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동반해야하기에 페달보드가 작게나마 있는 사람. 베이스의 역할이 단지 저음만이 아니라고 믿으며, 험악하지 않은 언행을 하는 사람. 콘트라를 연주할 수 있다면 더 좋고.
적고 나니 베이스가 그나마 양반인데, 저 당시 나는 설마 원석이가 그 모든 걸 전부 할 거라 기대하지 않고 내 맥북에 플레이백을 만들어갔는데, 놀랍게도 첫 합주가 굉장히 부드러웠다. 종현이형과 원석이 모두 단지 녹음된 VSTI 라인이 아닌 자신만의 플레이를 녹여와 덕분에 합주를 진행한 4-5곡으로 바로 공연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Snowstorm과 Igloo는 모두가 재해석해 다시금 만들어낸 곡이다. 비록 지금은 유통사에서 음원이 내려간 탓에 화질 및 음질이 낮은 영상들 뿐이지만, Igloo는 곡에 이야기를 소설처럼 적어내어 퇴고하듯이 초안부터 모두가 편곡을 진행했으며 Snowstorm은 원석이 덕분에 다른 곡들처럼 메트로놈에 갇히지 않으며 정해둔 뻣뻣한 연주법이 아닌 우리만의 약속으로 무대 밖으로 곡을 확장할 수 있었다는 확신을 주었다. (불가능할걸 알지만 기회가 된다면 다시금 작업해보고 싶다.) 그 때와 같은 사람과 연주를 한 번이라도 소리로 묶어본다면 내 이십대를 잘 마무리할 수 있을 듯 해.
아무래도 체온은 웅비와 종현이형의 군입대로 인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합주 또한 그저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고, 원석이와 나는 군 문제가 당장 급하지 않았기에 따로 이것 저것 작업을 시작했다.
SPD와 Nord Drum을 이용한 라이브 시퀀스, 인터랙티브 아트, 아날로그 악기가 아닌 신디사이저로의 방향성, 다양한 월드뮤직 악기들과 [곡]이 중점이 아닌 [약속]과 [흐름]을 중요시 하는 여러 작업물들. 신디사이저를 세 대를 켜 두고 즉흥적으로 연주한 작업물이 고장나버린 맥북 탓에 아쉽게도 없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지치지만 새로운 방향성을 갈증하며 지냈다. 체온의 곡도 둘이서 재해석해보려하고, 둘 다 함께 새로운 장비와 트렌드, 취향을 찾아 술과 연락을 멎지 않았다.
그러던 중 원석이가 나도 함께 알던 다예누나와 함께 새로운 팀을 시작했다 이야기를 건넸고, 처음에는 단지 내가 도울 수 있는 선인 믹스와 마스터링을 도와야지 싶은 마음에 작업을 함께하자는 원석의 말에 동의했다. 컨셉 탓에 고생을 하는건 아닐까 잠깐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누구보다 잘 해낼 걸 알아서 어쩌다보니 10곡이 넘는 곡을 함께 작업했다. 한 두 곡은 기타도 연주하고, 몇 곡은 악기 소리와 톤을 함께 고민하며 추가하고, 한 곡은 녹음과 편곡까지 함께 진행했다.
처음 정규앨범 CD가 나올 때 기분은 사실 그리 격정적이진 않았다. 사실 나는 더 이상 아날로그의 의의를 찾기 어려운 마음이 더 강한지라, 받고 나서도 고생했다 하며 맥주를 마셨다. 작업이 빨리 마치는 날이면 칭따오를 4캔 사서 반씩 나눠 먹으며 인생 힘들다는 웃음만 이야기했다. 둘이 맛있는 음식을 먹은 적은 적다. 거의 맥주와 삼각김밥, 편의점 과자, 값싼 피자와 종종 가던 이제는 사라진 마라집.
그러던 중 원석이 덕분에 함께 새덕후라는 다큐멘터리 유튜브 제작을 하고 나서는 함께 진행할 워크플로우와 작업 호흡이 비슷해져서 이것 저것 더 함께했다. 다소 과정이 힘들지 몰라도 결과물은 항상 좋았고, 결과물은 아직 적지만 전주 영화제 출품작이라던지 광고 음악 등을 함께 진행하게 됐다. 새삼 적다보니 정말 짧은 기간동안 많은 일을 함께 해왔다 싶을 정도네. 올해에는 앰비언트 트랙을 하나 작업해볼 예정이다. 나는 달란트의 134340이 아직도 가장 좋다. 작업실에서 쓰러져 자며 작업해본게 정말 얼마나 오래였는지. 그 곡은 원석의 목소리가 참 따스해서 나는 여전히 잠들때 종종 틀어두고 잔다.
사실 적다보니 어제 단독 공연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많지 않을 듯 하다. 유튜브를 시작한 원석은 멋진 세션들을 구해서 새로운 편곡을 진행했다. 좋아하는 곡의 부분들이 나올 때 마다 영상을 촬영하다보니 아무래도 인스타그램의 스토리를 평소같지 않게 사용해버렸네. 중간 중간 진행되는 달란트다운 이벤트, 연결 방법 역시 센스있는 둘과 세션분들 덕분에 세트리스트가 굉장히 짧다고 느껴질 정도로 돌아왔다. 마침 비가 오기에 2017년 체온의 공연을 하고 폭우를 맞고 홍대 거리를 걷던 때가 생각났다. 사라진 특정 클럽에서 페이도 못 받은채 특정 밴드의 오프닝처럼 활용된 탓에 여전히 혀 끝이 씁쓸하다. 사실 새삼 글로 적다보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적어도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의 관해서는 종종 이렇게 글을 적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하나 이야기할 수 있는건, 원석은 음악을 참 잘한다. 아니, 나아가 예술을 잘 하고 스스로를 잘 사용한다. 그렇기에 나는 항상 원석에게 배운다. 다소 부족한 탓인지 나는 계속해서 연주하고 작업하는 팀이 변경되지만, 묵묵하면서 재미있고 탄탄한 달란트는 그래서 내게 전혀 우습지 않다. (여담인데 나는 원석의 자아 중 마르게리따가 좋다. 제발 믹싱할 때 불고기만 아니길.)
오래도 알고 지냈다. 힘든 일을 서로가 전부 말하진 않지만, 서로가 서로를 다루는 방법을 알기에 우리는 제법 신기한 사이가 되었다.
2019년 마지막 경, 내가 첫 개인 공연을 할 때 원석은 긴 글을 적어 주었다. 그 글에 대한 답가로는 다소 부족하다고 느껴 또 다시 적을 예정이지만, 우리가 더 보낼 시간이 길 것을 알기에 타자를 급히 재촉하지 않고 오늘은 이만 글을 줄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