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란 건 무엇이고, 수용은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걸까. 호의가 담긴 선물 혹은 마음을 주고받는 것에 익숙치 않던 나는 일전에는 미숙한 어린 마음에 부끄럽지만 오히려 거절하고, 한 걸음 멀어지는 방법을 택했었다. 내 생일 등의 기념일을 숨기는 일에 익숙해지고, 오히려 혼자 보내는 매일에 대해 익숙한 방법을 찾아가는 편이었다. 몇 년 전 쯤 부터 감사한 마음 덕분에 마냥 호의와 선물을 거절하는 것 보다는 더 좋은 방법이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선물하는 법이란 사실을 배웠고, 마음도 동시에 그렇게 선물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어쩌면 사실 이전에는 물질적인 선물보다 오히려 마음이 더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었던 듯 하다. 마음의 무게는 내게 정말 무거운 편이기에 상대방이 그 모든 것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알아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던 듯 하다. 상대의 일이 바쁘고 힘들테니 작은 마실거리와 간단한 간식 쿠폰을 보낸다던지, 좋아하는 식사 메뉴를 선물하거나 같이 나눈다던지, 서툴지만 요리를 만들어주거나 건강을 걱정해주며 돕는다던지. 그렇게 나는 호의와 선물을 주고 받는 일을 그맘때 쯤 배웠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삶에서 금전적인 여유와 미래의 내 음악, 모습을 먼저 생각하는 나로썬 직설적이게 닿을 수 있는 호의는 익숙하지 못한 편인 터라 나는 항상 멀리서나마 응원하고 돕는 호의만을 주로 해왔던 듯 하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닿지 않거나 부족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최근 너무나도 감사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감사한 선물도 종종 받게 되었다. 내가 되려 건네는 모든 것들이 사소해질 수 밖에 없는 크나큰 응원이 담긴 선물과 여러 마음들. 고운 구석이 없는 모자란 내 얼굴과 흉한 몸을 아름답게 촬영해주신 사진과 영상들, 시간과 금전을 낼 수 밖에 없는 다소 번거로우셨을 카드와 스티커 등의 감사한 굿즈들, 디저트를 좋아한다니 매번 챙겨주시는 쿠키 등의 스위츠, 건강에 이상이 있을 때 나를 걱정하여 달려와주는 마음과 약, 혹시라도 휴일 근무와 이후 돌아가는 길이 씁쓸하진 않을지 걱정해주어 건네는 음식과 편지, 책과 향수를 좋아한다니 건네주신 서적과 향수들, 몸을 다듬는 걸 좋아하는 나를 알고 건네주신 여러 화장품과 관리 용품, 종종 장문의 메세지로 건네는 위로와 격려까지. 글로 적자니 민망해질 정도로 많은 선물을 받았다. 처음에는 장문으로 거절했던 어떤 선물들도 있었지만, 누군가 혹은 누군가들의 많은 마음이 담긴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 하여 외려 나는 더 힘을 내야한다는 마음을 먹었다. 외려, 나 또한 그 상대에게 필요한 선물을 찾고 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어떤 관계는 사람을 바꾼다. 늘 그랬듯, 좋은 방향으로도 혹여 안 좋은 방향으로도. 전자의 경우를 자주 느끼게 된 근래, 어쩌면 덕분에 조금은 성장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보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호의를 표현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근래에는 꽤 제법 많은 사람들을 마주한다. 감사하게도 나와 내 음악을 좋아해주시는 분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지인들, 알고 지냈지만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 내가 만나고 싶은 몇 사람들. 기쁘게도 그럴 때 마다 나는 내 시간을 여유롭게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말로써 상대에게 안정을 주는 법을 배웠다. 작은 호의와 짧은 시간이 얼마나 크게 와닿을 수 있는지, 귀가길 내 근무지에 들러 인사 혹은 간단한 선물을 주는 감사함이라던지. 어쩔 수 없게 누군가와 함께하지 못하는 순간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공연을 해야 하거나 작업 혹은 레슨이 있는 날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나의 일정을 먼저 두게 된다. 수익원과 근속이 불투명한 불안함. 매장 일을 그만둔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나는 여전히 구직 사이트를 습관처럼 들여다본다. 이러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주변이 기다려주는 새로운 내 작업의 쾌적한 준비와 건강한 나, 그리고 수준 높은 강의와 레슨을 위해서 그만둔 것이니, 해야 할 일을 잘 하며 절약하고 감내하는 방법이 맞다.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 있는 주변을 아끼고, 금전의 불안함 탓에 다시 잃지 말자.
강의가 끝날 1월에는 더 배움이 더뎌지는 나이가 되기 전 면허를 따야한다. 몇 번이고 주변 이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을 만들고 싶지 않아 어릴 적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싶은 마음이다. 사실 늘 그렇듯 몇 가지의 큰 트라우마가 아니라면 나는 마음을 다듬고 이겨냈으니 해낼 수 있다. 분명 낙담할 일도 생기겠지만, 내가 운전을 할 일이 살면서 갑작스럽게 한 번은 있겠지 싶은 마음이다. 아마 이사에도 영향이 있을테지. 이사 또한 1월 전에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공간을 찾고 변화를 만드는 일은 분명 다사다난할테니 강의에 집중하여 잘 마치고 가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긴 할 듯 하다. 빈 집에서 늦은 오후를 보내고 싶다. 비록 여유롭지 않았더라도, 산울림 소극장 앞 옥탑방이 내게는 너무나도 멋진 기억인 이유이겠지. 퇴근한 친구가 사 온 소주와 고량주, 간단한 안주에도 즐거웠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여유가 존재했었던 듯 하다. 왔냐고, 문 열어주며 편안하게 쉬라 말하던 법을 다시금 찾아올 때가 되었다. 지금의 공간은 나에게 여러모로 눈치를 봐야하는 어려운 곳이기에 나는 늦은 시간에만 갈 수 있다는 강박 탓에 잃는 것들이 종종 생기는 편이네.
애초에 돌이켜보면 항상 나에게 필요한건 온연한 침묵과 스스로가 사랑하는 방식의 여유였다. 재작년 이맘때 즈음부터 어쩌다보니 너무나도 갑작스레 생긴 여러 일들은 눈 앞의 질투 혹은 부러움과 자극을 불렀고, 그렇기에 멈추지 않고 숨을 가쁘게 쉬며 어떻게던 발악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며 어디에던 나의 이름을 만드려했다. 이제와서 생각하지만, 반은 성공이지만 반은 실패였다. 나는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했고, 몇 소중한 사람은 심지어 저만치 잃었다. [어떤 곳]에서의 [누군가의 나]를 만든다는 모자란 생각을 왜 했을까. 나는 나 스스로 온연히 존재하며 관리해야한다. 지금까지의 나는 누군가가 옆에 존재하거나 설명해주지 않더라도 온연한 나 스스로를 구축하는 법을 알았는데, 어떤 것에 눈과 귀가 팔렸는지 잠깐 정신을 잃었던 기분마저 든다. 우습지. 나는 내가 만들어온 지금의 나 자체만으로도 어디에서나 독보적일 수 있다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가득 섞인 확신을 왜 잃었던건지 의아하기까지하다.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홀로서 이렇게 나와 내 지식, 확신, 그리고 주변을 구축했다.
어제부로 다음주부터는 매주 있던 작업이 없어졌다. 다른 작업은 되도록 잡지 않을 것이며, 소리를 만들고 강의 준비를 하자. 그럼에도 나는 매일 저녁 쉴 시간을 만들기로 스스로와 약속했고, 잊고 놓았던 피부 관리를 다시 하며 건강이 엮인 호흡기 관리도 다듬어보자. 다른 이에게 쓰는 시간을 조금만 더 내가 사용하고 싶은 곳에 사용하자. 내가 만나고 싶은 이를 만들고 걷고 싶은 곳을 걷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찾자.
더는 내 소리를 미루지 않아야 한다. 이만하면 되었다. 나는 많이 배웠고, 비워냈고, 엮어낼 준비가 되었다. 나를 아껴야 한다.
글이 다소 난잡하지만 과하게 다듬지 말자. 어떤 순간의 기록은 다소 정리가 모자라기에 더 솔직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