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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th/type

팔월 이십삼일

모두가 명확히 한 사람 몫을 해야 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어디쯤 겪고 있을까. 나는 두루 잃어가는 일에만 익숙한 마치 낡은 책장같은 사람.
 
며칠 전, 잠긴 문을 누군가 자연스럽게 열고 들어오길래 놀라서 깼더니 할머니가 웃으며 바라보셨다. 바로 꿈을 깨고 떠올려보니 곧 기일이구나. 어제는 덧없이 길가에서 쓰러진 이를 보았다. 작업실 오는 길 항상 지나쳐오는 흡연 구역, 흔치 않게 다수의 사람이 모여있어 무언 일인가 보았더니 나와 그리 나이 차이가 보이지 않는 이가 초점 잃은 눈으로 덩그러니 쓰러져있었다. 낡은 구두가 벗겨진 채, 주변에서는 급히 파란 빛 셔츠를 젖히며 고개를 위로 들게 하여 웅성이면서 급히 어딘가에 모두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서 왠지 모르게 숨을 삼켰다. 왜인지 모르게 침전된 기분이 들며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서 오랜만의 글자락에 적는지 모를 지금조차도. 
 
어떤 음악은 어떤 때와 곳을 가리킨다. 맑은 어쿠스틱과 청량한 일렉은 여전히 오래 전 여름을 기억한다. 따스한 건반의 움직임은 눈을 가만히 감게 하며 어떤 침묵을 일러준다. 처음 노래하던 모든 사각형의 공간, 느린 걸음이 섞인 이른 푸른 저녁, 웃음이 옅게 서린 황혼길. 지금도 그렇지만 보다 주변 이가 많지 않던 때부터 소리는 내게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도 너무나 명확히 볼 수 있는 나만의 어떤 순간을 그려주어왔지. 좋아하는 음악가들의 버릇다운 선율은 늘 그렇듯 그 때의 이야기와 공기, 향기까지도 내게 기억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그래서 그 시대의 음악과 영화를 잊지 못한다. 그 시대의 만화책을, 애니메이션을 잊지 못한다. 그 시대의 나를 잊지 못한다. 언젠가 내 음악이 누군가 한 명에게라도 닿길 바라며 매일 울며 웃고 품고 절망하며 추락하되 벅차던 모든 날들을. 
 
며칠 전 프랑스에서 유학 중인 친구가 잠시 들렀다. 늘 그랬듯 오전에 갑작스레 나눈 메세지이지만 먼 거리의 우리는 기회가 많지 않은 친구이기에 흔치 않게 다소 이른 시간 나섰고, 신기할 정도로 여전하다는 인사를 시작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같이 짧지 않은 날들 동안 팀을 해왔던 친구라서인지 의외로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서로. 코로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도 '너는 코로나 전 부터 애초에 마스크 매번 썼잖아' 라며 웃는 기억력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식사 시간임에도 카페로 약속을 말한 이유 또한 낮 식사를 잘 않는 내 습관을 기억하고 있었네. (기억력에 관한 다른 이야기는 내일 마저 적기로 하자.) 우리는 스물 둘 이후 4년 주기로 연락을 한다. 친구는 근래 동물 이름으로 곡을 짓고 있고, 덕분에 물닭이라는 동물을 새로 알았다고 한다. 학교 강의가 없는 날엔 음악원에서 아이들 수업을 하고 지낸다 말했고,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지 고민하고 있다 말했다. 종종 어떤 삶을 이야기하는 과정은 항상 마음이 저릿하고 아프다. 
 
'넌 창작자야, 아직아. 마음이 다치면 안돼.'
 
며칠 전 수강생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좋아하는 취향을 말하기가 조금 두렵다고, 혹시라도 이상하게 취급되면 어떻게 해야할지 어렵다고.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다, 여전히 그렇고 사실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욱 그랬다. 하지만 유일하게 달라진 하나라면 나는 누군가에게 이제 그럴듯해 보이고 싶지 않다. 고상해보이지 않아도 괜찮고, 마냥 빛나도록 유려히 빛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구김살이 많은 약한 어두운 사람임이 맞기에 구태여 있지도 않은 거짓 허물로 감싸지 않는다. 그렇기에 방법의 일환으로 나는 솔직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굳이 말하지 않고 조용히 품고 지낸다. 사실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수줍음일지 몰라도, 나는 보이는 것들에게 정을 주지 못하니까.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은 형태가 생기니까. 그렇기에 나는 늘 무형의 것들에 가장 소중한 나를 담고, 그 곳에 내 모든 온기를 건네왔다. 나는 그렇게 내 안에서만 형태를 유지하는 내가 아끼는 것들을 모으고 엮는다. 

누군가에게는 기억을 담는 궁전이 있다면, 나에게는 기억을 담는 앨범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쉽게 무언가 잊지 않는다. 아니, 않을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