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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이십일일

eeajik 2023. 6. 21. 17:41

며칠 전, 세계를 스스로 거부한 친구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공교롭게도 나는 오래 전 부터 알아온 다른 친구를 만날 수 밖에 없었다. 열 아홉이 지나 막힘없이 어디에서나 술을 마실 수 있던 그 때, 그 친구를 처음 알았다.

 

그럴듯한 유명 예술 대학 어디에도 합격 통보를 받지 못했던 나는 반쯤 포기한 채 혼자서 다시금 홀로 방에서 음악을 짓고 있었고, 그러던 중 주변의 소식으로 어쩌다보니 충정로에 위치한 학위 인정 전문 학교를 알게 되었다. 정시가 남아있었지만 언어를 제외한 수능 점수와 내신, 출석 상황이 좋지 않던 나는 기대를 않을 수 밖에 없었고, 그래도 배울 것이 있겠지 싶은 마음으로 원서를 넣었다.

 

당시는 지금보다 학위 등 타이틀에 더욱 예민하던 시기였고, 당연히 학위 인정 학교는 좋은 눈길을 받을 수 없었다. 특히나 예술 대학은 워낙에 [유명한 몇 군데가 아니면 차라리 가지 않는게 낫다] 라는 인식이 많았기에 당연히 그 곳에 입학을 지원하는 이는 많지 않았고, 그렇기에 나는 2곡을 지원하여 어렵지 않게 합격 통보를 받았다. 더불어 장학금 이야기를 들은 후라 더 이상 집에 빚을 지지 않아도 될거란 마음에 정시를 포기하고 입학을 마음먹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페이스북이 더욱 강세이던 때, 어리던 나는 지금 생각하면 귓볼이 붉어질 정도로 부끄럽지만 주변에게 하나라도 더 당당하고 싶은 열띤 마음에 프로필 속 학교를 등록해두었다. 그게 그 친구와의 시작이었다.

 

뜬금없이 받은 메세지. 술 한잔 나누지 않겠냐는 그 어이없을 정도로 당당한 메세지를 받고 잠깐 고민이 들었다. 체중이 비대하던 그 때의 나는 사소한 만남에도 걱정이 앞서던 시기였기에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나 망설였지만, 그는 내 프로필의 학교를 보았다며 어차피 같은 곳에 다닐 사람인데 자기는 서울 친구가 전혀 없으니 소주 한 잔 사겠다 슬쩍 약속 장소를 건네는 말투가 마냥 싫진 않았다. 1월 초, 나는 지금은 사라진 홍대 2층의 모듬전을 파는 곳에서 2,000cc 맥주 피쳐에 소주를 두 병 붓고 있는 그 친구에게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태어나서 버스 종점을 간 기억은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모듬전에 소주 다섯 병, 맥주 2,000cc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자신감이었나 싶다. 더 우스운 점은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혀가 꼬이고 어질해가면서도 치기 어린 나이의 말도 안 되는 용기로 계속된 술자리 덕분에 음악 이야기와 서로의 삶 이야기를 터놓고 나누다보니 시간은 야속하게 첫 차를 탈 시간이었고, 우리는 헤어지기 전 아무도 없던 홍대 놀이터에 가서 서로의 곡을 불러주었다. 그 친구의 곡은, 붉고 청록빛이었다. 또렷히 기억하는 그 색채 덕인지, 1월의 차가운 바람 탓인지 잠과 취기가 잠시나마 사라져 첫 버스를 탈 수는 있었지만 다시금 만연히 오른 취기에 제대로 방까지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첫 OT, 어딘지도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 친구는 기타를 들고 왔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도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도 될 일이었다. 버스에 앉아 라디오헤드가 어떻고, 데미안 라이스가 어떻고, 김광석과 빛과 소금 그리고 시인과 촌장이 어떻냐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도착한 장소에서 그 친구는 기타를 메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산을 마주하며 웃었다. 그 때, 종종 자신은 워낙에 도심보다 나무와 바다가 익숙하다 말했던 그 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2m에 가까운 장신, 어깨를 넘는 장발, 굵은 골격 덕인지 강인해보이는 몸과 모든 일을 비틀어 생각하고 싶다는 듯한 짜증스러운 눈썹, 맑진 않지만 그렇다고 흐릿하지는 않게 초췌한 눈길. 그 모든 것이 산이랑 어우러지는 순간을 마주하며 이 사람은 무언가 다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날 저녁, 모두가 오르지 않으려 하던 강당 무대에 자신의 곡이라며 호기롭게 기타 한 대로 자기  소개 겸 노래를 하는 모습을 기억한다. 그 날 밤, 우리는 말이 통하던 다른 이들과 함께 또 다시 밤을 새며 술을 마셨다. 다른 방에서 남은 소주와 맥주까지 전부 비워버리고 어떤 소리를 짓고 싶은지 포부를 나누던 우린 서울로 돌아와서도 대화가 모자라 길거리에 앉아 남은 과자에 막걸리를 마셨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수 많은 음악과 미학, 글, 영화 등에 관한 고찰을 안주 삼아 그 날도 우린 막차를 타고 돌아갔다. 언제나 그랬다, 우린 보이지 않는 수 많은 것들에 대해 마치 눈 앞에 있는 듯 열띤 토론을 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사라질지 모를 것들에 대해. 

 

학교를 다니는 내내 많이도 옆자리에서 수업을 들었다. 한창 내가 필기를 하면 옆에서 힐끗 보며 포스트잇에 [글자 말고 다른 걸로 기억하는게 난 편하던데] 같은 내용을 적어 주면, 나는 뒷면에 [시끄러워, 글자가 더 완벽해] 같은 답장을 적어 주며 실없이 웃던 짓을 하던 기억도 남아있다. 이론 수업이 아닐 때 함께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당시 내가 다니던 학과에서 미디와 작편곡을 능숙히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극히 한정적이었기에, 그 친구와 같이 팀 과제를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몫을 해야 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해야 했다. 그 친구는 다소 거칠고 투박하지만 흙 향이 기분좋게 짙은 소리를 지었고, 나는 그보다 차갑고 정밀한 소리에 내가 생각하는 온기를 엮는 법에 집중했다. 

 

그 친구와 내가 동시에 싫어하는 수업이 있었다. 시창 수업, 우리는 맨 뒷자리에 앉아서 항상 서로가 지난 밤 적은 가사와 편곡 아이디어만을 나눌 정도로 흥미가 없었다. 수업 내용이 별로였던건 아니지만 우리는 그 교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유의 고압적인 태도, 밴드 음악과 전자 음악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반응 등이 그 이유였다. (오죽하면 체온의 [폐어]라는 곡은 그 수업 중간에 기타를 빌려 들고 나가 비상구 계단에서 쓰고 돌아왔었다.) 그러던 중, 그 친구와 내가 참지 못하고 교수와 언쟁을 한 적이 있다.

 

다른 어떤 것도 별로 신경쓰지 않던 우리지만, 어느 날 그 교수가 수업 중 그런 이야기를 했다. [국악과 양악은 근본부터 다른 수준이다. 국악은 사용할 수 있는 음계도, 연주도 한정적이지만 양악은 그렇지 않기에 모든 면에서 더 발전된 음악이다. 그렇기에 국악은 기술적으로나 이론적으로도 발전하지 못한 음악이며, 더 하위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나와 그 친구를 포함한 몇 명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했고, 나 또한 화가 나 일어나서 강의실을 나가려고 하던 도중 그 친구는 느릿하게 일어나 교수에게 역으로 자세히 질문하며 사과를 요청했다. 모두가 보는 내내 그 친구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논리적으로 반박했으며, 나 또한 옆에서 자세한 해명을 요구했다. 교수는 퇴실을 요구했고 그 친구는 피식 웃더니 욕설을 내뱉고 나갔다. 알고 보니 그 친구의 어머니는 국악과 한국 포크를 좋아하시어 당신의 가게에서 직접 노래하시던 분이었다. 선선한 가을, 함께 강원도의 바다를 앞에 두고 그 친구의 어머니의 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던 날이 기억난다. 수 많은 국악기, 낡은 어쿠스틱 기타. 네가 노래를 지은 곳들을 걷다 돌아와 잠든, 담배 냄새 찌든 낡은 네 자취방.

 

비슷한 가정 과거를 지닌 우리는 종종 옛 생각에 힘들어질 때면 말 없이 만나 담배를 피우며 술을 마셨다. 너무 얇고 여리어 사라질지도 모르는 어젯 밤 떠오른 상념과 가삿말만을 미지근한 술에 섞어 마시던 날들. 멘솔을 죽어도 못 피우겠다고 말하는 너는 종종 취중 내 블랙 멘솔만은 그나마 괜찮다며 한 개비씩 바꾸어 피웠다. 넌 언제나 참이슬은 못 마시겠다며 처음처럼을 마시고, 나는 아무렴 좋다며 너와 같은 병을 골랐다. 서로가 겪은 폭력과 강압의 날들을 애써 설명하지 않고, 밤 하늘 보며 침묵을 안주 삼아 술을 자주 마셨다. 종종 고요를 부수듯이 내던지는, 요즘 무슨 음악 듣냐고 싱글 묻는 네 말투를 기억한다. 그  때의 너는 너 자신을 다룰 줄 알았다. 나는 내가 너라면 자신을 다루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낮게 그르렁대는, 커다랗게 이글대는 스스로를 이길 수 없을 것 같다고. 

 

13년 7월, 스트레스 탓에 더 비대해진 내 몸무게는 당시 100 언저리 숫자를 웃돌았다. 매번 밤샘으로 인해 마시는 콜라와 몬스터, 저녁 편곡 작업 후 항상 들르는 학교 앞 저렴한 냉동 삼겹살집에서의 소주들, 홀로 방에 돌아와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인해 익히지 않은 스팸을 캔 째로 맥주와 먹던 탓이었겠지. 학교의 수업과 여러 방식은 진전이 없었고,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떠나갔으며 동시에 몇 교수들은 수업에 굉장히 무관심하기까지 했다. 이대로는 나를 잃겠다 싶어서 나는 학교를 그만두겠다 말하고, 체중 감량을 시작했다. 이후 감량에 성공한 2015년까지, 나는 그 친구를 포함한 그 누구와도 연락을 길게 갖지 않았다. 당연히 멀어질거라 생각했지만, 2016년 초 갑작스레 연락이 왔다. 앨범을 낼 거라며, 나와 함께 만들고 싶다고. 

 

그 친구는 이미 2013년도 EP를 낸 적이 있었다. 내가 참 좋아하는 곡이 담긴, 서투름이 멋스러운 아끼는 앨범이다. 다만 그 때는 멤버가 단 두 명이었고, 이제는 나를 포함한 다섯이서 앨범을 지어보고 싶다며 내게 연락을 주었다. 그 전까지도 종종 연락을 하던 다른 이들은 나도 아는 종종 만난 그의 동향 친구들이었기에 프로젝트를 구성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자세히 몰랐지만, 그 때 그 친구는 이미 다소 망가져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너의 너무나도 마른 몸에 짧게 자른 머리를 의아하게 생각했었지. 너는 입원 치료를 길게 받았다고만 말했다. 너는 작업에 늦거나 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작업 도중 멍하니 앉아 있는 일이 잦았고, 나를 제외한 친구들과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비정상적으로 많이 말라가며 수척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알고 보니 췌장암에 걸려 수많은 약을 처방받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던 너는 단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고, 하루 종일 카멜 필터만 피웠다. 술자리를 가서도 앉아만 있던 비쩍 말라가는 나목같은 모습이 인지부조화가 와서 나는 트랙 정리를 핑계삼아 술자리를 가지 않았다. 자연스레 작업이 마치면 운전은 그 친구의 몫이었고, 덕분에 몇 안 되는 그 해 겨울의 좋은 기억이라 말할 수 있는 새벽녘 드라이브를 다같이 떠나본 경험도 했다. 그렇지만, 앨범 작업의 끝이 다가올수록 망가져가는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심한 고통과 약, 불면과 불안 탓에 예민이 극에 치달은 그 친구는 정상적인 소통과 안정적인 대화를 할 수 없었고, 나를 제외한 모두와 다투며 멀어져갔다. 어찌 저찌 완성은 했지만, 얻은 건 없었다. 단지 절대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들이 만날 수 있던 기회 그 뿐 이었다. 그는 그렇게 모두와 점차 멀어졌다. 

 

2019년, 갑작스런 결혼 소식을 들었다. 나도 알고 있는 이였다. 그 사람이라면 네가 안정적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소 안심이 들었다. 귀여운 고양이 몇 마리와 함께하는 집으로 찾아가 축하를 건넸다. 그렇지만, 그 달이 지나기 전 또 다시 입원 소식을 전해들었다. 더욱 심해진 췌장암과 내장 기관의 문제, 심각해진 착란과 망상. 잦은 입원을 위해 머리를 바짝 짧게 깎은 비쩍 마른 그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이상했다. 찾아간 병실에서 꼭 앨범을 만들어야겠다고 비틀대며 말하는 너는 마치 부러질 것 같은 손가락으로 정작 음식조차 제대로 한 술 뜨지 못했다. 그리고 이맘때, 너는 깊은 고통에 젖은 탓인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 자연스레 연락이 멀어졌다. 나는 너를 가까이 할 수 없었다. 미안했다. 

 

2021년과 2022년, 종종 메세지를 받았다. 하지만 내용은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망상들이 뒤섞인 두서 없는 문장. 누군가가 너를 해하려 하고 깎아내리려 한다며 내게 20개 가까운 메세지를 밤 사이 보내고, 다음날 사과하고. 갑작스레 괜찮아진 말투로 자신의 문제점을 솔직히 말해달라 울먹이고. 함께 작업하고 싶다며 종종 보내주는 데모 또한 예전 너의 음악과는 많이 다른, 다소 서툴어지고 과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 말을 아낀다, 나는 여전히 너의 음악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기에 자세히 적자니 마음이 아프다. 

 

지난 주 월요일, 서울역 근처 언덕 중간 벤치에서 너를 만났다. 이 또한 아이러니하게 네가 아닌 너의 배우자와의 대화로 인한 것이었다. 근래 심각해진 네 모습을 보고 이별을 결정하기로 했고, 그 전 내가 한 번 마주해줄 수 있냐는 그의 이야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네게 전화를 했다. 이야기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밖에 나서면 전화기의 전원을 끄는 일이 다반사, 대화조차 길게 하지 않고 모든 건 작업 상 비밀이라며 네가 제일 사랑하고 믿는다던 사람에게 숨기는 일이 많아지고, 약속이 있다며 나간 너를 발견한 곳은 집 앞 편의점. 집을 나선지 1시간이 지난 후인데도 내내 길거리에 서서 바닥만 보고 있던 너를 보고 놀란 누나는 내게 이야기를 조심스레 건네었던 거라 말했다. 3일 밤을 새고 하루 몰아 자며, 그마저도 눈만 간신히 감고 있는 너. 새벽이나 밤 갑자기 약속이 있다며 갑작스레 나서고, 집에 돌아오면 소파에 앉아 아무것도 -문자 그대로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네 모습이 무섭다고 말했다. 통화 내내 너는 나를 멀찍이 지난 저 뒷편에 말을 걸듯 전화를 받았다. 너를 기다리는 내내 담배를 피웠다. 몇 년만에 만남이 이렇게나 갑작스러울 수 있구나. 왠지 모를 긴장에 입술을 깨물었고, 손이 조금 떨렸다. 네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눈길을 떨굴 수 밖에 없었다. 손 인사를 건네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몸을 던지듯 걸어오던 너는 내가 손을 잡아도 나인 줄 뒤늦게 알았다. 더 말라 있었고, 내가 알던 눈이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너는 웅얼거리고 나는 문장을 제대로 듣지 못해도 대화를 계속했다. 콜라 한 잔 마시고 싶다는 말에 편의점에 가서 네게 콜라를 건네고 막걸리를 한 병 샀다. 우습게도 대화 내내 나는 너와 대화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모든 문장은 맥락의 순서가 맞지 않았으며, 확실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말을 피하며 너는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음악을 만들 거야, 앨범을 낼 거야. 어떤 앨범이야? 네가 꼭 엔지니어링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언제쯤 생각해? 9월, 아니, 이번 년도는 그렇지만 쉴까 싶다. 당장 집은 어떡하게? 모르겠어. 밥은 먹어? 조금은. 누나랑 잘 이야기 한거지? 나, 자야할 것 같아. 그래, 돌아가서 자자. 고마워, 잘 가. 잘 자. 

 

언젠가 네가 많이 나아졌을때, 그럴 수 있다면, 혹시라도 이 블로그를 보게 된다면 내게 망설임 없이 메세지를 보내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적었다. 나는, 언제나 스물 언저리의 그 모습처럼 너를 기다릴테니까. 네가 불러준 네 곡은 여전히 내가 참 좋아하는 곡 중 하나다. 무덤 위 달맞이꽃도 달을 보려 고갤 내미는데, 쓸쓸한 밤 내옆에 날 부르는 이 하나 없네. 네 외로움 어린 그 노랫말을 한 겨울 홍대 놀이터 시린 손과 목소리로 불러주고 씩 웃던 네가 제법 그리운걸 어쩌겠어.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옛 제주 친구의 곡 제목처럼 우리는 늘 그 곳이 아닌 그 때가 그리운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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