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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부터 오이지는 여름 반찬으로 자주 있었다. 매콤하게 무쳐 낸 마늘 향 고춧가루 빨간 오이지 무침은 반찬으로 가끔 도시락에 올랐고, 집에서도 빼 놓을 수 없었던 반찬이었다. 종종 오이지라는 반찬이 부끄러웠던 적은 있었다. 친구들의 예쁘게 꾸민 도시락 속 인스턴트 음식 반찬이나 독특한 고기 반찬이 부러웠어서일까, 작은 어두운 색의 도시락 통 속에 담긴 상당히 한국적인 반찬들이 나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이지가 싫진 않았다. 섭식 장애가 오기 전 까지도 꽤 좋아하는 반찬이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오이를 좋아하셨고, 그래서인지 다양한 요리법으로 항상 밑반찬에는 오이지가 있었다. 나는 매콤하면서 참기름 냄새 고소한 무침도 좋아했고, 종종 고추장으로 진하게 양념한 오이지도 꽤 좋아했었다. 그 여름 쯤 할머니가 급성 치매와 풍으로 인해 하루 종일 누워서 생활하시기 전까지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머니와 보내던 내게 오이지는 아주 익숙하되 불편하지 않은 가까운 반찬이었다. 치매 투병 이후 고모가 집안일을 도와주시러 오셨을 때, 무치지 않은 물 오이지는 당신께서 투병 전 즐겨 드시던 음식 중 그나마 자극적이지 않았기에 여전히 할머니의 반찬으로 냉장고에 항상 오이지 무침과 나란히 용기에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지난 2개월 전 까지도 나는 도저히 양념을 옅게 한 물 오이지는 먹을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물과 음식이 섞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 습관이 있는 나는 수육이나 오차즈케도 즐겨 먹지 않는다. 또한 집에서 식사를 같이 하는 건 대체로 부모님보다는 할머니가 많았기에 물 오이지는 할머니만 드시는 반찬이라는 인식이 어느 순간 잡혀 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왜인지 다른 내 친구들보다 병이 심해지시고 나서는 인태를 자주 찾으셨다. 이름이 당신 입에 익숙하셨기 때문일까, 이후 병이 심해지셔서 입원하신 후에도 그렇게 인태 이름을 부르셨었다 들었다. 아직도 기억에 물 오이지가 선명하게 남은 날이 있다. 치매와 풍이 심해지신 12년 혹은 13년 6월 경의 여름 하루, 고모가 일이 있으셔서 내가 할머니 식사와 약을 챙겨 드렸어야 하는 날이 있었다. 합주와 작업을 잡지 않고 인태랑 웅비와 피자를 사 온 후 거실에서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점심 식사 겸 약 시간이 되어 할머니가 드시기 좋게 푹 끓여낸 흰 감자국으로 끓인 죽과 미지근한 물 오이지를 쟁반에 담았다. 그 날 아침, 식사 때 감자죽에 분말로 된 약을 한 움큼이나 섞어서 내어 드려야 한다고 고모에게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약이 반 이상이나 섞여 든 음식의 맛을 상상하니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긁혔다. 당신께서는 항상 나이가 늘어날 수록 냄새가 나기에 더욱 관리 해 줘야 한다고 하시며 하루에 목욕을 꼭 두 번 하셨고, 식사는 혼자 드시더라도 정갈하고 깨끗하게,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맛있게 해 드시고 꼭 칫솔질을 하시던 분이었다. 그런 할머니께 드리는 그 음식의 모습과 상상된 맛은 너무 가혹했다. 색채가 하나도 없는 하얀 죽과 색채가 없는 투명한 물 속 담긴 오이지. 할머니의 창백한 얼굴. 하얀 할머니의 옷. 하얀 할머니의 침대. 할머니 방에서 나던 약 냄새. 어릴 적 부터 병원의 하얀색은 내게도 지독하리만치 익숙했지만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다. 하얀색과 오이지를 더 싫어하고 미워하게 된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먹고 있던 피자가 더 이상 마저 먹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 해 여름을 넘기시지 못하고 떠나셨다. 며칠 전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데 냉장고에 물 오이지가 있더라. 입에 대지 않던 어머니도 요즘은 종종 오이지를 드시더라. 갑자기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술김에 꺼내서 한 입 먹어 보았다. 새큼하면서 밋밋하지만 아삭한 오이의 향이 났다. 꽤 괜찮다는 생각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하얀색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니 마시던 술도 하얀 막걸리였네. 담배를 처음 피워 보았을 때 할머니께 들켰었다. 슬쩍 나갔다 들어올 때 할머니께서 조용한 목소리로 '몸에 맞지 않는 사람이 많은 무언가는 대체로 이유가 있으니 네 몸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하다.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도 많이 피우셨었던 기억이 나네.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아라' 라고 말 하셨다. 할머니랑 경동시장에 간 기억이 난다. 길 거리에 많던 한약재와 무섭게 생긴 벌레들과 시끄러운 사람들. 할머니에게는 노래를 한 번 밖에 불러드린 적이 없다. 잘 치지도 못하는 기타로 할머니 방에서 조용히 부르던 이적의 노래. 할머니는 항상 당신 손이 나이 들어서 축 쳐진 걸 보고 왠지 모르게 우스워 하셨다. 곧 8월이다. 여름이고, 다시금 활동을 꾸려 볼 계절임과 동시에, 언제까지나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