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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th/type

촛농자국

 내 방을 와 본 사람은 알겠지만, 내 방 창문 옆. 피아노 앞에는 큰 책장이 있다. 하지만 말이 책장이지, 책을 꽃는 것은 정작 위에 내가 올려다보는 윗칸 뿐. 책은 사람이 올려다봐야 한다는 생각에 책장 아래쪽은 안쓰는 종이들과 박스 등으로 채우는 편이다. 그 안쓰는 아래 3칸 중 3번째 책장 위에 초를 올려다놓고 켜 두는 편인데, 방금 전 작은 소리가 들려서 보니, 촛농이 넘쳐서 흘러 바닥까지 떨어지는 소리였다. 이미 쏟아졌으니 돌이킬 수도, 어떻게 할 순 없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다 보니 이곳 저곳 튀어서 다 흉터를 남기고. 딱딱하게 굳을 때 까지 기다렸다가 칼로 하나하나 자국을 뜯어냈는데도, 그래도, 하얀 책장에 붉은 촛농은 뚜렷하게, 혹은 흐릿하게 남아있다. 하나하나 전부 뜯어내려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먼지가 쌓일 것인데. 그러면 보이지 않을 것인데. 뭐하러 이렇게까지 할까’. 그만두고 촛불을 끄고 긁어낸 촛농 찌꺼기들을 하나 하나 모아서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돌렸다. 과거에 있었던, 방금 전까지 있던 어떤 일이던. 어쩌면 촛농 자국과 비슷한 것 같다. 사람들은 '과거'라는 말을 너무도 멀게만, 흐릿하게만 본다. 1초. 방금 전도 과거인데. 과거라 말하면 바래져서 굳어져 있는 오래 전의 시간만 본다. 촛농처럼 시간은 빠르게 흘러 순간은 굳어버리고, 그건 너무나도 차갑게 식는 법이다. 그 위에는 1초 후인 지금부터 먼지가 쌓이고, 오랜 시간이 되면 그 자국은 가려져 보이지 않겠지만 다시 먼지를 닦으면 여과없이 예전 자국 그대로 보이게 되겠지. 과거는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추어 지고 덮여지는 거다. 좋은 과거든 싫은 과거든, 과거는 돌이켜보면 가벼운 눈물과 찡한 마음을 자아낼 때가 존재한다. 울음은 멋진 일이다. 우는 것 또한 멋진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눈물과 울음, 슬픔을 부끄러워하고 창피라고 생각하고, 치부라고 말해버린 채 너무 딱딱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과거를 부끄러워하지만 난 오히려 그 과거가 내가 사랑하는 일에 승화될 때 얼마나 찬란할지 알고 있기에 내가 겪은 사소한, 위대한 과거에 감사한다. 또한 단순한 그 과거를. 어쩌면 너무 슬프고 아픈 과거를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을 바꾸어 주는 음악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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