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어제 장필순씨의 새 앨범이 나왔었다. 투명한 체명악기의 눈이 시리듯한 선명도와 아름답고 따스한 패드, 고열에 찌그러진 듯한 신디사이저, 뒤돌아서는 수많은 리버스된 악기, 약간의 차가움을 허브처럼 얹어주다가 적막을 뚫는 글리치한 기계음들. 그럼에도 묵묵한 건반. 선율을 점찍는 기타. 잘 못 어우러지면 어쩌면 식상해질 수도 있는 이 모든 소리들이 식상하지 않고 휘몰아치게 아름다운 건 장필순씨의 목소리가 이토록 아름다워서가 아닐까. 하루라도 이런 목소리였다면 정말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다. 끝자락 조그맣게 소리치는 자그만 기계와 목소리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 내 곡을 믹스 시작하기 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쩜 이리 소리 한 곡 부서지듯 섬세할까.
도저히 마이킹을 지속적으로 바꿔 가며 하기에는 장비도, 공간도 무리가 있어 페달형 캐비넷 시뮬을 구매했다. JC 앰프로 마이킹 한 소리가 테스트를 해 보니 나쁘지는 않았지만, 보다 크리스피한 브리티시 감각의 질감이 필요했다. 다행히 정보가 아예 없진 않았다. 3년 전 쯤 부터 탐나던 모델이 하나 있었는데, 가격도 조금 나갈 뿐더러 당시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 소리에는 이 앰프 소리가 만족스러워서 생각을 자꾸만 그만 뒀었다. NAMM 2019에서 그 회사의 새로운 모델이 나와 오랫동안 고민했다. 보다 다양한 캐비넷과 마이크, 파워 앰프가 존재하지만, 페달형은 일정한 기타 톤을 합주 시 ON/OFF로 활용할 수 있을 테고, 혹여 PA로 진행해야 할 때 유용할 것이라는 석원이와 준이의 의견으로 페달형인 구형을 구매하기로 했다. 물건을 기다리던 중 아답터가 없다는 이유로 조금 저렴하게 나온 매물이 나와서 연락을 드렸다. 저녁 시간대에 합정역에서 거래를 진행하기로 하고, 아답터를 구매하러 버즈비에 들렀다. 녹음에 필요한 새 스트링 두 세트. 합정역 알라딘에 들러 카테고리들을 보며 마음에 드는 책들이 있나 살펴 보았다. 소설류에 내가 가지고 있던 책들, 혹은 좋아했지만 낡아서 버렸던 책들이 대체로 많아서 신기했다. 금단의 팬더, 라스트 송, 식스티 나인, 인간실격 (같은 표지) 등등 .. 비소설류의 수필 계열은 내 취향이 아닌 것들이 역시 많다. 한 권 정도 구매할 예정이었지만 마음에 닿는 책이 없어 약속 시간에 출구로 향했다. 친절하시고 섬세하신 여러 설명과 함께 입금을 드리는데 너무 익숙한 성함이라서 순간 조금 놀랐다. 몇 년 전 JC를 이능룡씨에게 구매했을 때도 입금할 때 성함을 보고서야 알았다. 공연을 잘 다니지도 않고, 딱히 아티스트의 얼굴을 잘 검색해보지 않는 사람이라. 이번에도 내가 너무 좋아하는 아티스트분이었기에 구매 후 돌아가며 인사를 드렸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앨범의 전곡을 이 모델로 작업했다고 하시며 격려도 해 주시다니. 설레서 다 김이 빠져버린 콜라를 마시며 손이 벌벌 떨리며 돌아왔다. 준비를 차곡 차곡 하자. 왠지 존경하는 아티스트에게 구매한 악기들이 많아지니 마음이 조금 든든해지는 기분이다.
낮 시간 오랜만에 30분 정도 걸리는 연희동을 찾은 건 오랜만이다. 셋업을 위해 갈 때 말고는 사실 잘 오지 않는 곳이다. 수 많은 종류의 메뉴를 지닌 낯선 식당은 괜시리 나를 침체되게 만들고, 그 곳에서 우수수 웃으며 식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자꾸만 침몰한다. 내 작업실과 집에서는 이동 수단이 애매한 것도 내게는 감점 부분. 학교 다닐 때 즈음 공중파에서 진행하던 밴드 프로그램을 잠깐 지나치다 인터넷으로 봤을 때, 어떤 팀들도 매력적이라 느끼지 못했지만 한 팀은 예외였다. 스티커가 붙은 채 낮게 매어진 베이스, 역색의 건반 앞에서 구부정한 채 뱉어내는 온연한 목소리, 단출하고 단단한 무거운 드럼. 내가 좋아하지 않는 팀의 음악을 연주하셨었고, 난 의외의 그 계기로 그 팀의 음악을 찾아보고 이제는 몇 앨범을 좋아하게 됐다. 갑작스러운 탈퇴는 무슨 일인지는 몰랐지만 아쉬웠으며, 베이스 탈퇴 이후 그 팀을 예전처럼 좋아한 적은 없다. 알고 보니 좋아하는 국내 포스트록 팀을 하시고 계셨고, 망설이다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했다. (예전에 비해서 나는 팔로우를 최대한 다양하고 망설이지 않게 시도하려 한다. 나 따위가 어떻게 팔로우를 하지, 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올라오는 사진에서 보여지는 연남동. 언젠가 지나치면 보아야지 생각만 하다, 사소한 이유로 댓글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일이 많아지고 IK 의 Bundle 수준과 사운드에 관해 고충을 이야기하다 자연스레 예전 팀 이야기도 나오며 지금 팀 이야기와 카페 일 이야기도 나오게 됐다. 망설이지 말고 놀러 오시라는 말에 어버버하느라 화요일에 간다는 말만 전하고, 일정도 제대로 말씀을 못 드렸다는 사실을 잊었다. 알코올 냄새가 조금 섞인 그 본문은 우리의 내일(?)을 위해 삭제하자고 웃으며 말하셨다. "앞으로 있을 수 많은 화요일 중 언제 오실지 아직 모르지만 그래도 기다릴게요. 꼭 만나 봬요." 아쉽게도 그 주의 화요일은 몸이 너무 아팠고, 도저히 연희동을 갈 상황이 아니기에 그 다음 주 화요일인 16일 찾았다. 두시 반 경 도착해서 휘적 휘적 근처를 걸었다. 이 곳에 친구가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이 곳에 자주 오던 때가 있었는데. 날은 내 생각보다 더웠고, 생각이 나서 다시금 async 앨범을 들었다. 들어간 카페에는 아쉽게도 생각하던 얼굴이 계시지 않았고, 조금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다 싶은 마음에 커피라도 마시고 책을 읽다 가자는 마음으로 결정. 나는 커피를 차갑게 마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캐러멜 마끼아또는 더욱. 특히 아메리카노는 더더욱. 산미가 적은 원두였기에 더 마음에 들었고, 오래 전 구매했지만 읽지 않고 잊었던 책을 폈다. 그믐이라는 말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책을 덮을 때 즈음, 배려해주신 건지 먼저 다가와 인사 건네 주셨다. 역시나 사람을 대할 때 긴장하는 나는 생각했던 말은 하나도 못하고 '음악 너무 감사합니다' 라는 말만 건넸고, 웃어 주시며 다음 커피는 한 잔 선물해주시겠다는 말씀 등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갈 때 탁자에 올려진 페달을 보고 결정했다. 최대한 화요일은 이 곳에 오자. 돌아가는 길에는 짧은 책이라도 한 권을 구매해서 읽자. 돌아오는 길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기 위해 지하의 책방을 들렀고, 아쉽게도 내가 원하던 에바로드는 없어서 다른 책들을 살폈다. 오랜만에 다시금 카프카를 읽고 싶었고, 백은선 시인의 시집을 구매했다. 매 주 화요일은 이렇게 보내자고 나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더위에 차서 버즈비를 속절없이 지나치는 나를, 오늘 저녁의 나는 다시 버즈비로 오면서 후회하겠지. 하루 동안 어찌나 많은 일이 있었던 화요일인지. 작은 Jim Beam 과 Jameson 을 구매해서 책상에 두고 귀가 전 조금씩 맛 보는 요즘이다. 위스키가 내게는 사진이나 글만큼 제법 좋은 취미가 된 것 같다. 언젠가는 와인도 그럴 수 있길. 오래간만에 읽는 카프카는 예전과는 또 달라서 재미있다. 그레고르, 그레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