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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th/diary

시월 십팔일


 

삶을 구성하는 너무나도 존경해 마지 않는 피아니스트 네 명 중 두 명이 떠나갔다. 나는 결국 그 둘의 공연을 직접 단 한번도 보지 못했고, 오히려 그게 더 오늘의 내겐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내가 그들에게 찾는 것은 일종의 존경의 파편일테고, 나는 내가 생각하며 지낸 공상의 그들을 마주하는 것이 지금에선 더욱 긍정적일 뿐 직접 마주하지 않는다고 하여 부정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언제나 누군가의 공연을 잘 찾지 않았다. 누군가를 구태여 만나지 않는다. 나는 정을 붙이는 일을 미워하고 두려워한다. 장소와 시간의 남는 모든 기억은 정이라 말하지. 사실 언제부턴가 더는 새로운 음식을 먹고 싶지도 않고, 새로운 공간을 찾고 싶지도 않다. 새로운 즐거움이란건 무슨 색채일까, 색을 잊은 화가는 공중을 잊은 새와 같을까. 새로운 누군가와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다. 파편처럼 남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라는 말을 듣는 것을 최대의 사치라 생각하며 지내고 싶다. 돌아와서, 그렇기에 근래에 방문한 모든 공연을 후회하진 않지만, 가지 못했다고 하여 속상할 일은 크지 않은 이유도 비슷하다. 어차피 사라질 것들. 이젠 기대하는 일을 시작하는 순간조차 마음이 아리다. 지쳤다 말하기엔 너무 우습게도 어린 나이이기에, 그저 아리다.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섬이 되는 과정을 겪고 있지만 더욱 더 먼, 왜소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섬이 되어야 한다고 근래 생각했다. 이미 나는 누군가에게 차가운 성벽, 날카로운 망루의 서리, 혹은 눈꼴신 포도, 나아가 바라보고 싶지 않은 냉소적인 초록색 이끼일수도 있지만 더욱 그렇게 느끼도록 해야 한다. 나를 찾는 이가 다가와 손끝을 베이고 떠나가야 할 정도로, 날 선 말투를 옷 삼아 걸쳐 입어 상처받아 욕설을 내뱉고 가까이 하지 않을 정도로 그래야 한다. 더욱 더 멀고, 외람된 섬. 섬이 되어야 한다. 안정하지 말고, 평안하지 않고, 따스한 온기 따위는 전혀 없는 불온하고 황량한 섬. 숲도 없고 강도 흐르지 않는, 연못조차 마른 섬. 나조차 나를 기대하지 않고 내 공간을 포근히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기에 나는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먼저 놓는다. 나비 타투를 받고 돌아오던 길 데려온 기타는 며칠 전 지인에게 저렴한 가격에 보냈다. 절대 팔지 않기로 다짐했던 페달 두 개를 정리했고, 남은 소중한 페달 중 하나는 엔지니어 지인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저렴한 가격은 아닌 아답터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고, 남은 몇 스피커 받침대도 내일 나누어 주기로 했다. 국내에 판매하지 않는 파이프 연초는 어제 지인에게 전부 나누어주었고, 인터페이스 2개는 판매하고 그 금액을 바탕삼아 한 제품으로 바꾸기로 했다. 마지막 고민은 언제나 프로펫이지만 그를 떠나보내면 왠지 노드를 보낼 때 만큼 오랫동안 아플 것 같네. 유우는 보낼 일이 없겠지만, 거북이 친구는 언젠가 보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다. 마음의 빚도, 금전적인 실제의 빚도. 세상에 나와 빚, 소리만 존재하는 기분이 든다. 새로운 음식을 먹고 싶지도 않고, 새로운 공간을 찾고 싶지도 않다. 

 

작업실이 점점 낡고 비어간다. 나는 리니어와 게르다를 계속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문득 했다. 오늘 아침, 내년 중반 쯔음엔 지금 내 곁의 이들이 날 버리고 떠날 수도 있겠다는 합리적인 상상을 했다. 그러기 전에 먼저 섬이 될 준비를 마쳐야 한다. 항구조차 없는, 애초에 아무도 찾지 않았던 것 처럼 아프지 않을 그런 섬이 될 준비. 그럼 덜 아프겠지. 지금처럼 아팠기보다, 덜 아플 수 있겠지. 네 말이 맞다. 누군가 날 미워할거라면 내가 먼저 멀어지는게 더 나아.

 

다시 복직한 곳에서 그런 질문을 받았다. 서른 중반엔 무얼 할 생각인가요? 그러게요. 저는 그냥 아무도 없는 숲이 가까운 낯선 섬에 가서 살고 싶어요. 욕심부릴 것도 없고, 질투할 것도 없이 온연히 나 자신과 매일 대화할 수 있는 그런 곳에 가서 살아보고 싶어요. 지루하지 않겠어요? 나는 늘 지루했어요. 지루함은 일종의 평안함을 모르는 자만심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해서 무언가를 잃어본 사람처럼 말하네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무언가를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괜찮아요, 우리는 무언가에서 항상 실수하죠. 맞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좋은 저녁 보내시길. 

 

오늘은 말 없이 조용한 음악을 들어야겠다. 나는 이리 휘갈겨 쓴 글씨가 종종 필요하다. 이것 또한 솔직한 내 모습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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