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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이십일

eeajik 2018. 3. 20. 20:47

생일은 혼자서 편히 잘 보냈다. 낮 시간 여유롭게 듣고 싶던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밤엔 언제나 가는 아주 좋아하는 가게에 가서 맥주와 연태를 시켜서 혼자 음악 들으며 책을 읽었다. 중간 무렵 조금 취기가 오르니 웅비가 보고 싶어졌다. 전화해서 혹시 와 줄 수 있는지 물어본 후 자리를 정리해 두니 곧 웅비가 와서 같이 이야기 나누며 마셨다. 시간은 참 강하고 우리는 미약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 요즘이다. 사실 몇 달 전에 자주 오는 이 가게를 4월 경 다른 분에게 넘긴다는 이야기를 나눈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안 그래도 꿈이랑 있던 일이 구별이 잘 안 가다보는 요즘 이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현실적인 사유라서 꿈에서 깨고 나서도 놀랐었지. 그 날 저녁 그래서 당장 지표와 가게에 가서 사장님께 웃으며 '여기를 다른 분에게 넘기신다는 이야기를 꿈에서 듣고 걱정이 들어 왔어요, 우습지만요' 라고 말씀 드렸더니 왠지 모르게 묘한 복잡한 표정이셨다. 그럴 일 없다고 왜 이야기를 않으셨는지 조금 의아했지만 그 이유를 생일 날 알았다. 4월 경에 동생분 내외에게 이 곳을 전임할 생각이시라 하신다. 집이 너무 멀고, 나이가 있으시기에 슬슬 힘드시다고. 마음에 쿵 소리가 났다. 애써 그래도 웃으며 힘드셨을텐데 고생하셨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그 날 나에게 전임 야기를 듣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일인데 너무 신기했다고, 놀라서 당황해서인지 반응이 좀 묘했다고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더라. 다행히 전임자가 친인척이다보니, 전임 받으실 동생분 내외에게도 다음에 나를 소개해준다고 말씀 해 주셨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해 주셔서 나야말로 너무 감사했다. 생일 선물 이시라며 내가 좋아하는 경장육사를 만들어주셔서, 맛있게 잘 먹고 돌아오는 빗 길이 참 차더라. 체온 작업 때도, 혼자 기분이 안 좋은 날도, 그리고 몇 번 있던 프로듀스 작업 때 마다 오는 곳이었다. 자주 올 때는 일 주일에 3번은 넘게 왔었지. 맛있는 곳이라고 추천을 잘 않는 편인데 여기는 항상 친구들에게 소개하던 곳 이면서도 매번 좋은 평가를 받았던 곳이다. 웅비, 지표, 최근에는 아름이와도 자주 오는 곳이었다. 항상 알아서 술 꺼내 마시고 마지막에 정산하는 방식이 서로가 편할 정도로 친한 곳이었다. 메뉴에는 없지만 손이 많이 갈게 분명한 찹쌀 섞인 (엄청나게 맛있다 못해 맛있어서 처음 먹은 날에는 자리에 모든 사람이 말잇못한) 감자전을 매번 비밀이라고 슬쩍 주시던 것도 너무 감사했고, 고수를 청할 때 처음에 먹을 줄 아냐는 표정과 함께 신기하다는 말씀도 기억한다. 불이 조금 약하다 싶으면 바로 새 숯을 해 주시는 것도 감사했다. 내가 화장을 처음 하고 간 날 너무 잘 어울린다고 하신 말도 기억이 난다. 여기 만두는 항상 때에 맞춰 소가 바뀌는데 그게 또 엄청나게 맛있었다. 부추가 메인인 날도 있었고, 가끔은 고기가 메인인 적도 있었다. 작년 겨울 부터는 가끔 숙주를 매콤하게 볶아 주시는데 그게 또 일품이었다. 친구들마다 각자 먹는 양념도 취향 별로 다 다른데, 그걸 또 기억해주시고 주시던 사장님 내외가 너무 감사했다. 저번에는 심지어 술 자리가 길어지니 맥주를 한 병 서비스라고 주셔서 감사했다. 새로운 메뉴가 나올 때 마다 먹어봐서 더이상 안 먹어본 메뉴는 훠궈뿐이라 다다음주에 도전 할 생각이다. 해에는 여유가 없어서 아직 못 드렸지만 작년까지는 새해에 꼭 좋은 술을 한 병씩 선물 해 드렸는데, 4월 가시기 전에 한번 더 찾아서 선물 드리고 싶다. 항상 일이 늦게 끝나 열한시에 도착해도 시간 걱정 말고 이왕 먹는 거 편하게 먹으라고 말 해주시고, 술 하시고 계실 때는 한 잔 드리고 이야기 나누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족발 시켜 드시다가 맛보라며 나누어 주시기도 하고, 지표도 과일 선물을 드리거나 치킨을 가져가서 같이 나눠 먹은 기억도 있다. 술 마시다가 가까워진 옆 테이블 누나와 눈썹 그리는 방법 이야기도 했던 기억이 나고, 아름이 동생을 데려와서 먹었던 기억도 난다. 술 마시던 다른 테이블 아저씨 두 분과 합석해서 정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도 나네. 재미있는 들이었다. 지표가 군입대를 했을 때, (수료식 날이었나 첫 휴가였나..) 여하튼 여기가 먹고 싶다고 해서 지표 어머니가 꼬치를 사 가시고, 내가 여기 맥주를 사간 기억도 있다. 술에 만취해서 벽에 기대 잠든 곳도 이 곳이 처음이었고, 우리가 담근 술을 마신 곳도 여기였지. 그 두 날은 같은 날이다 (....) 성림이형 앨범을 만드는 내내 편곡이 생각이 나지 않을 때 마다 이어폰을 꽂고 술을 마시며 문자로 이야기를 나누던 곳도 여기였다. <자몽 한잔 더?> 자몽에 이슬에 한창 꽂혔을 때. 사실 아까 위에서 적은 좋아하는 경장육사를 처음 먹은 곳도 여기였다. 마라탕을 처음 먹은 곳도 여기고. 양꼬치를 소금구이로 먹어도 맛있던 곳도 여기였다. 다른 곳은 선도가 안 좋아서 별로인데, 여기는 오히려 더 좋았다. 사실 대체로 우리는 거의 양념을 옅게 해서 먹는 편이지. 싱거운 인간들. 올 때 마다 세 명이 십 만원 가까이 먹는 유일한 가게지만, 그만큼 유일하게 아깝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사라지면 안된다고, 돈 많이 벌어서 여기 메뉴 다 시켜서 먹을 거라는 이야기를 실실 웃으면서 했었는데 평소에는 약간 과묵하시던 남자 사장님께서 크게 웃으면서 꼭 잘 되는 한 해가 되라고 말씀 해 주셨던 기억도 난다. 내가 섭식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서인지, 그래도 먹고 싶은 거면 맛있게 먹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던 사장님. 다른 곳보다 맛도 좋을 뿐더러 친한 분들이 된 곳 이기에 장사가 잘 되면 좋겠다는 생각만 많이 했다. 보고 싶을거라고 그 전에 많이 오겠다고 웃고 집에 와 남은 술을 마시던 중 하카다가 생각 났다. 지금은 랄라블라가 들어온 홍대 설빙 1층에 있던 돈부리 가게. 홍신이형과 웅비와, 밥 잘 먹던 예전의 나와 아름이도 어쩌다보니 나와 연락을 않아도 자주 간 곳. 나는 잃는 모든 것에 눈물을 가지는 편이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혼자서 조용히 눈물이 났다. 고마웠어요, 사장님.  금방 사라지는 모든 건 참 무섭다. 인간은 나약하니까 인간이 만든 모든 건 나약하기 마련일까. 익숙한 풍경이라는 건 사실 어쩌면 참 나약할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동네는 더욱 그렇다. 어제 보았던 가게가 문을 닫고, 주인이 바뀌고, 무너지고. 익숙한 건 금방 무너지기 마련이 아닐까. 생각보다 나약한 건 많다. 그렇지만 나약하지 않은 척 어깨를 세우고 허리를 곧장 펴고 다니라 말하고 점점 신발코를 못 보는 경우가 많아지고 건물이 점점 높아지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자주 한다.생각보다 참 나약하다. 언제나 어렵기에 울감을 함부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이끼와도 가까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점점 생각에 낀 이끼 탓에 모든 걸 둔하고 삐걱대게 만드는. 그 공간도 그렇지만, 그 공간에 묻어있는 시간들이 그리워져. 돌아보기만 해도 잔상이 보이는. 지나가 버려서 쥘 수도 없는. 나는 항상 그렇다.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하며, 그렇게나 안 좋은 일이 끼어 있던 과거들인데도 이상하게 자꾸 그리워진다. 나는 4월이 지나면 한 동안 양꼬치와 연태고량을 마시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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