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의 세팅을 바꾸었다.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구매했고, 메인 서밍 믹서를 해체했다. 몇 페달을 판매한 후 보드 케이블 라우팅을 다시 잡고, 사용하지 않지만 모으던 플러그인과 샘플을 망설임없이 삭제했다. 지금까지 작업했던 프로젝트는 전부 압축하여 드라이브에 아카이브했고, 단순히 내가 만든 소리와 당장 작업해야 할 프로젝트만 남겨두었다. 버려야 할 것들을 버렸고, 창고에 넣어 둘 것은 그러모아 정리했다. 다시금 이 때가 왔구나 싶다. 항상 나의 신변을 정리하는 이 때, 나는 나 스스로 혹은 누군가와 약속을 한다. 다시 해 보자. 무서워하지 마, 네가 쌓아온 시간과 과정을 믿어. 너는 이 과정을 겪을 수록 새로운 너를 짓는거야. 마리아나 해구에 대해 곡을 쓴 날을 문득 생각한다. 숫자 다섯개와 알파벳 하나로..
그가 연주하는 건반의 음표 사이 간격이 좋았다.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건반을 들었지만, 그의 왼손 간격과 오른손의 흐름은 다른 누군가에게서도 느껴볼 수 없던 치밀한 거리감이었다. 관계에서도 절묘한 거리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선 그 곳에서 안정감을 느낌과 동시에 그만큼 흐릿한 불안감을 느낄 수 있어서 자주 그의 건반을 찾았다. 짓누르듯 비가 오면 THREE 앨범을 찾았고, 날이 괴롭게 평이하면 Async를 찾고, 다소 흐린 어두운 밤엔 Playing The Piano 앨범과 12를 찾았다. 다소 어려워 무언가도 닿지 못할 때는 Coda와 Async 영상을 반복해서 보았다. 소리를 짓는 일에 비참한 환멸이 문득 다가올 땐 Insen과 Cendre, Plankton을 들었다. 예전 작업실에서 MCML를 듣..
내가 이 곳에서 사라지더라도 그 어떤 장례식엔 오지 말아요. 이 짧은 당부의 문장을 나를 아는 이들이 읽을 수 있는 곳에 적다보면 값싼 조소를 머금게 된다. 분명 유서 비슷한 틀에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말을 수없이 적어도 자기 마음대로 할 걸 알기에, 아직 차마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서까지 미리 당부를 하고 있는 사실이 참 우습지 않니. 내가 사라진 후에도 분명 자신 제멋대로일 사람 탓에 이런 글을 적는다는게. 나는 내가 아는 이들을 그 따위 장소에 모아두고 혹여 있을 슬픔을 공유하게 두고 싶지 않다. 나의 관한 슬픔과 그리움은 부디 조용한 곳에서 홀로 앓아주세요. 조용히 차라리 내가 지은 소리들을 들어주세요. 이것도 역마살이라면 역마살일까. 지속과 안정의 순간을 문득 두려워하며 피하고 그 때 스며드는 순..
내가 못 해내는 것들을 잘 해내는 걸 보며 부러워하는 것과, 내가 잘 해내는 것들을 더 잘 해내는 걸 보며 부러워하는 것. 혹은 내가 잘 해내던 것들을 그보다 덜 해내지만 축복받는 것. 세 가지 중 어떤 모습이 내 오롯 부러움의 퇴적물일까. 나는 언제나 뒤꽁무니에서 멍하니 잃어온 걸 바라보며 씁쓸히 웃는 사람. 따스한 축사와는 거리가 먼, 평안과는 그보다 두 걸음 먼, 외려 바람 부는 고원을 찾고 싶은 마음. 다들 어디서 어떻게 돈을 벌고 모아 취미를 가지며 음악 작업까지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걸까. 내가 너무 게으른 탓일까, 내가 무언가 모자란걸까. 인스타그램의 스토리와 트위터 타임라인을 볼 때 마다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들은 불어나지만 정작 나는 좁은 매장에서 좋아하는 앨범을 종일 틀고 유리와 바닥..
스무살 언저리부터 주변과 대화를 나눌 때 반쯤 우스갯소리로 생일은 시간을 잘 지내고 있는지 과거와 미래의 삶이 내게 조소 섞어 묻는 것 같아서 썩 유쾌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어릴 적 부터 선물이라는 걸 받을 때 마다 가족이라는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은 무게의 생색과 선물을 받은 대신 내가 해내야 할 무언가를 동시에 듣고, 내가 혹시라도 가지고 싶은게 있다면 어떤 이유로 가지고 싶은지 문서로 설명해야하는 상황을 자주 겪은 나는 보답이라는 말의 무게와 몫이라는 단어를 감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저변에 둔 채 탄생일에 대한 유쾌한 기억을 단 하나라도 만들지 않기 위해 내 주변에서 숫자를 지웠다. 특정 날짜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우는 방법은 제법이나 쉽다. 모든 곳에서 눈에 닿지 않게 내리고, 내가 구..
늘 그렇듯 순서의 순환은 중요치 않으며, 어쩌면 그보다 나열과 선택에 가깝다. 총괄적 미학은 극히 미세한 일부를 소중히 다룰때 누구도 모르게 슬쩍 생성될테고, 오히려 전제를 두어야 하는 곳은 다르다. 둘은 나뉘어져있지만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고, 교집합은 내가 짓는 것이 아니다. 중첩되는 모든 둔탁한 소리를 최대한 섬세하게 배치하고, 들리지 않는 것일까 싶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게 맞다. 나의 작법 자체에 대해서 스스로가 왜인지 잊고 있던 것들이 많네. 다시 생각하자, 잊지 말자. 나는 세계에서 나만이 지을 수 있는 소리를 다룰 줄 안다.
구태여 알려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온연한 내 소리와 공연을 닿게 할 날을 만들고 싶다. 나는 이 모든 짓는 과정을 그만두지 않을 이유가 언제부턴가 단 하나뿐이다. 그렇기에 놓지 않고 울음 누르며 묵묵히 걷는게 정말 미련한 내 방법이다. 언제 마지막으로 내 이야기를 담은 솔직한 연주와 노래를 했던가 고민해보면 주저없이 니어의 여름 공연이네. 그 이전을 찾자면 체온의 빵 공연이다. 그 시간의 과정, 소중함이란 단어를 알게 한 수 많은 순간을 잊지 않고 지내며 놓지 않는다. 가장 소중한 시간은 타투처럼 마음에 깊이 남는 법이네. 페달을 옮기는 카트, 고장난 벨트, 드림캐쳐, 이 모든 사소한 것들이 문득 생각날 때면 가사를 적는다. 울지 말자. 울지 말아.
아직 무엇도 확실치 아닌데 왜 아침부터 곡을 듣고 우는지 모르겠다. 미움보다 더 지독한게 애정이에요.